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빌라이 칸 (문단 편집) === 말년 === 그는 점차 재정 정책을 위한 [[색목인]] 관료를 대거 키우면서 몽골인들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의 사후부터 원 제국은 점점 번영이 끝나고 기울기 시작한다. 대규모 원정으로 재정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 특유의 후계 제도의 약점[* 장자 상속제가 아니라 모든 자식에게도 권리가 있다. 특히 몽골의 경우 장자부터 순서대로 크게 지원해주며 독립시키고 마지막 남은 막내가 최종적으로 승계하는 형식이었다.]과 황제가 [[티베트 불교]]에 물들어 [[명 4대 암군]]에 맞먹는 양태를 보여 문제가 심화되었다. 그리고 엄격한 [[한족]] 차별로 인구의 90%가 넘는 한족을 적으로 돌린 점도 있을 것이다. 대충 한족 10개 가구에게 식칼 1개 줘서 돌려쓰게 하고, 아궁이에 불때는 것도 허락받고 하고 수준이었다. 당시 색목인 관료들의 대표 주자로 [[권신]] 아흐마드 파나카티[* 阿合馬, 아허마, 아합마]가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었기에 '회회인'이라고도 불렸는데 [[자산운용사|돈 불리는거에 아주 뛰어나서]] 몽골 귀족들이 너나 할거없이 이들에게 돈을 맡기고 싶어했다. 1냥을 맡기면 10년 후에 1,000냥이 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색목인]]들은 몽골 왕공 귀족들의 마음을 얻고, 대칸에게 '우리는 재물은 좀 탐하지만 [[한족]]들처럼 반란은 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다가가 점점 조정의 중추를 장악했다. 아흐마드 파나카티는 [[카라 키타이]] 포로 출신으로 처음에는 궁에서 잡일이나 하던 자였는데 워낙 민첩하고 영리해서 쿠빌라이 칸에게 중용되어 중서평장정사[* 오늘날의 [[부총리]].]로 파격적인 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 역시 돈불리는데 귀신이어서 각지의 세율을 제멋대로 정하고 각종 광산 사업을 독점하며, 농기구나 생필품 값을 올려 백성들에게 강매해 폭리를 취했다. 또한 일부러 [[화폐]] 가치를 폭락시켜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수법으로 경제를 박살내고 자신의 배를 불렸다. 하지만 방법이야 어찌되었건 국고 수입을 올려 놓았기에 쿠빌라이 칸은 아허마를 총애했고, 대칸의 비호 아래 아흐마드는 조정에 붕당을 조성하고 대저택을 지어 수백명의 미녀를 첩으로 삼는 등 권력을 농단한다. 점점 못할 짓이 없게 된 아흐마드는 아예 조정 인사까지 주무르려하고 심지어 군권까지 넘보았으며 이에 중서좌승상[* 오늘날의 [[국무총리]].] 허형은 >"아흐마드가 이미 민, 재, 군정 중 이미 두 가지를 장악했는데 군정마저 아허마가 가지게 되면 매우 우려스러울 것입니다." 라고 상주했다. 쿠빌라이 칸이 >"아흐마드가 반역할까봐 그러는가?" 라고 묻자 허형은 >"증거는 없지만 이미 모두 갖추었습니다." 라고 하며 아흐마드를 경계해야 한다고 답했다. 아흐마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앙심을 품었고 >"네가 뭔데 증거도 없이 날 모함해? 모반자는 너같은 놈이다! 권력과 여자를 탐하지 않고 깨끗한 척하며 인심을 매수하는 것이 모반의 증거가 아니냐!" 라는 어처구니 없는 항변을 했는데 어이없게도 쿠빌라이 칸은 이 궤변을 옳게 여겨 허형을 귀양보냈다.[* 다만 청렴결백한 이들 상당수가 '너 혼자 깨끗한 척 하는거 딴 의도 있지?' 하는 의심을 받은 건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부패를 저질러야 했다. 이는 여느 조직들이 범죄나 그에 준하는 행위에 동참할 것을 강요해 공범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최빈이라는 신하가 아흐마드의 악행을 고발하자 모함해 죽였고, 병부상서 장웅비에게는 자신의 정적을 모함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장웅비가 >"무고한 사람을 모함해 얻는 벼슬 자리는 필요없소이다." 라고 거절하니 장웅비를 모함해 사직시켰다. 이렇게 아흐마드가 자신의 반대파, 특히 한족 관리들을 대거 모함해 숙청하는 짓을 일삼자 몽골 왕공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허마를 꺼리는 이들이 생겼는데, 쿠빌라이 칸의 장남 [[칭김]]이 대표적이었다. 칭김을 중국어로는 '진가'라고 하는데 유교적 정치 이상을 받아들였고, 한족 대신들을 존중했기에 아흐마드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느날 칭김이 아흐마드의 악행을 지적하며 그를 때린 적이 있었다. 조회 때 쿠빌라이 칸이 아흐마드 머리의 상처를 보고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아허마는 차마 태자가 때려다고 할 수가 없어서 넘어져서 다쳤다고 답했지만, 칭김은 >"아닙니다. 이자가 하도 간악해 제가 때렸습니다." 라고 하며 쿠빌라이 칸이 보는 조회 자리에서 아흐마드에게 >"이 죽일 간신배 놈! 죽일 놈!" 이러며 또 두들겨 팼다고. 쿠빌라이 칸도 사실 내심 아흐마드의 악행을 알고는 있었지만 하도 그 돈 버는 재주가 아까워서 내치질 못했다. 이러다 보니 [[칭김]] 태자부터 대신들, 백성들까지 모두 아흐마드를 증오하는 지경이었다. 아흐마드는 명장 [[바린 바얀|바얀]]을 모함하기도 했다. 아흐마드는 쿠빌라이 칸에게 바얀이 [[남송]]에서 압류한 재물과 미녀를 모두 가졌다고 모함했고, 화가 난 쿠빌라이 칸은 바얀의 저택을 압수 수색했지만 나온 재물은 전부 쿠빌라이 칸이 하사한 것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책...나중에 쿠빌라이 칸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하마터면 충신을 죽일 뻔했다." 며 후회했다고.[* 남송 정벌 이후 아흐마드가 바얀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이 자리에서 바얀은 아허마에게 옥으로 만든 고리 하나를 보여주며. "송나라 황실에 보물이 산처럼 쌓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네"라 말했고, 아흐마드는 이건 분명 바얀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며 앙심을 품었었다.] 1282년 쿠빌라이 칸, 그리고 태자 [[칭김]]이 도성을 비웠는데 무관 왕저와 고씨 성을 가진 [[승려]]가 아흐마드를 암살하려는 거사를 꾸몄다. 그들은 80여 명의 무사들을 태자부의 사람들인 것처럼 꾸며 아흐마드의 집으로 들어가 아흐마드에게 태자가 왔으니 맞을 준비를 하라 소식을 전했고 태자의 조서를 위조해 추밀원 부사[* 오늘날의 [[합참차장]]이다.] 장역이라는 자에게 군대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장역도 아흐마드를 증오하던 사람이라 태자가 아허마를 죽이려는 것인 줄 알고 따랐다. 그날 저녁, 왕저는 무사들을 이끌고 아허마의 집으로 가 >"태자께서 오시니 영접하라!" 라고 명령했다. 태자라면 오금을 저리는 아흐마드는 밖으로 나와 꿇고 고개를 숙여 대기했고 그틈에 왕저가 망치로 아흐마드를 내리쳐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이에 장역이 보낸 병력들은 이건 태자와 무관한 일임을 눈치채고 왕저의 무리를 공격했으나 왕저는 도망가거나 저항하지 않고 의연히 포박되어 왕저와 그 무리들은 처형되었다. 처형장에서 왕저는 >'''"나 왕저는 천하를 위해 해를 제거했다! 오늘 비록 죽지만 내일 사람들이 나의 사적을 기술할 것이다!"''' 라며 당당하게 2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아흐마드가 암살되자 조정 대신들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축제 분위기가 되어 모두 덩실덩실 춤추며 기뻐하고 술을 마시는 통에 대도[* [[원나라]]의 수도. 현재의 [[베이징]].]의 모든 술이 다 거덜날 정도였다고 한다. 민심이 이런 지경이자 쿠빌라이 칸은 그제서야 뭔가 느끼는 게 있었던지 >"왕저가 아허마를 죽임은 뭔가 까닭이 있는 듯하다." 라며 아흐마드가 간신이었음을 인정했고, 그의 시신을 버려두어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아흐마드는 죽었지만 그의 붕당은 처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잔당은 반격을 준비하여 바로 황태자 [[칭김]]에게 황위를 물려주라는 상소를 올렸다. 권력욕이 아주 강한 쿠빌라이 칸에게 이런 상소를 올림은 그야말로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격이라 잘못하면 칭김까지 연루되어 요절이 날 수도 있었다.[* 동아시아 왕조 국가에서 왕이나 황제가 멀쩡히 두 눈 뜨고 살아있는데 왕위를 양위하라 운운함은 [[역적|대역죄]]에 해당한다. 오히려 군주가 조정에서 신하들이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땡깡부리는 한 가지 수단이 양위 선언이었다. 이런 사단이 한 번 났다간 황태자나 왕세자부터 조정 신하들이랑 같이 멍석 깔고 앉아서 군주의 체면이 설 때까지 반성문을 씀이 관행이었다.] 이 상소의 폭발력을 우려하여 어사대[* 오늘날로 치면 [[감사원]]이다.]와 우승상 안동[* [[칭기즈 칸]]의 [[용장]]인 [[무칼리]]의 후손.]은 상소를 감춰놓고 올리지 않았는데, 아흐마드의 잔당들은 이걸 알고 쿠빌라이 칸에게 보고했다. 쿠빌라이 칸은 대노하여 안동에게 추궁했다. 안동이 아흐마드의 잔당이 꾸민 음모와 모함이니 들으면 안 된다고 간절히 항변하자 쿠빌라이 칸은 안동에게 >"그럼 그대의 죄는 없단 말인가!" 라고 물었다. 안동은 >"죄는 인정하지만 이건 태자를 모해하기 위한 음모이며 이것에 속으신다면 천하가 혼란해질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안동의 간절한 충언에 쿠빌라이 칸은 분노를 어느 정도 풀고는 아흐마드의 잔당들을 모두 처벌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칭김]] 태자는 병을 얻어 오래지 않아 4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쿠빌라이 칸 이후 황실의 내부 분열 양상을 생각하면 소양이 뛰어난 칭김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쿠빌라이 치세의 몽골은 남송 지역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그들을 최하위 단계로 두었는데 몽골인을 살해하면 무조건 사형, 색목인을 죽이면 중국 돈 은 80냥, 하지만 한족을 죽이면 [[나귀]] 2마리만 물어주면 끝이었다. 또한 물자를 징발할 때도 한족은 색목인보다 2배 이상 많이 징발당했고, 이 때문에 한족 지역에서 키운 말이 씨가 말라버려 오히려 한족이 기르는 말은 아주 희귀해 고가에 팔렸다고 한다. 또한 한족은 무기 소지 금지, 종교 집회 금지, 무술 교육 금지, 야간 통행 금지, 시장 개설 금지, 사냥 금지 등 각종 제약을 걸었다. 그리고 20가구를 하나의 '갑'으로 묶고 몽골인 '갑주'를 두어 한족들을 감시했는데, 갑주가 명령하면 그 안의 백성들은 음식이든 돈이든 여자든 간에 모두 바쳐야 했다. 훗날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를 무너뜨린 가장 큰 이유가 몽골인 갑주들이 부린 횡포였다. 그런 주제에 몽골은 남송을 정벌하고 나서도 남송 지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결국 남송이 망한지 70여 년 만인 1350년대부터 남부 [[홍건적]]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남부의 통제력을 아예 상실했다. 쿠빌라이는 79세에 붕어했는데 [[장수왕]]처럼 오래 살았던 탓에 황태자 [[칭김]]이 죽고, 손자 [[성종(원)|성종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쿠빌라이는 원나라의 증흥을 이끌었지만 반대로 원나라가 몰락하는 원인들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간신을 믿었고 권력 때문에 자기 아들마저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불교]]를 지나치게 중시해 대대로 원나라 황제들이 라마승에 빠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루이 14세]]나 [[무제(양)|양무제]]의 경우와 여러 측면에서 비슷한데, 쿠빌라이 칸도 이 두 사람처럼 장기간 통치하면서 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한편으로 무리한 원정과 권신들의 발호 등의 문제로 인해 황제가 죽은 후 나라가 기울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